
그럼 지금 K-Indie는 무슨 세대일까?
사실 K-POP과 K-Indie는 역사가 매우 비슷합니다. 90년대 중반에 태동했으며, 2000년대에 산업화의 과정을 거쳤고, 2010년대에 이르러서는 점차 글로벌 진출로 확장합니다. K-POP과 K-Indie은 발라드, 트로트, 포크 음악만이 중심이던 한국 음악계에 새로운 서브컬쳐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이었습니다. 하지만 K-POP은 전 세계적으로 주목하는 콘텐츠/IP 비즈니스의 비즈니스 모델로 성장한 반면, K-Indie는 이제서야 조금씩 비즈니스모델을 성장시키고 있죠.
어찌되었건 K-POP의 서막을 알린 SM엔터테인먼트도 30주년을 맞이했고, K-Indie의 서막을 알린 OUR NATION도 3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SM엔터테인먼트는 30주년 브랜드 필름과, ‘THE CULTURE, THE FUTURE’라는 새로운 슬로건을 공개했죠. 인디씬은 롤링홀 30주년 기획 공연과, 홍대 3대 명절인 2025 경록절을 통해 축하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우리는 앞서 K-POP의 세대분석 방법론의 핵심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방법론을 K-Indie에 적용시켜봄으로써 부족한 부분은 무엇이며, 잘한 부분은 무엇인지 점검하고, K-Indie가 산업적으로, 비즈니스적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성을 제시합니다. 해당 아티클에서 말하는 K-Indie는, 홍대앞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던 락, 포크 음악 중심의 장르를 일컫습니다.
1세대: 조선펑크와 모소모의 DRUG
날짜로는 1달 먼저 나온 배드 테이스트의 [Bad Taste] 앨범이 처음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음악 전문가들은 크라잉넛과 옐로우 키친의 <OUR NATION 1>을 인디음악의 시초로 보고 있습니다. 이른바 조선펑크의 탄생이었죠. 이 당시의 이야기는 아카이브K에 잘 정리되어 있어, 위 영상을 확인해시면 좋을 듯합니다.
모던락: 언니네 이발관과 델리 스파이스
한국 모던락의 역사를 놓고 이야기할 때에 두 아티스트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하이텔의 모던락 소모임을 이끌던 이석원이 자신도 밴드를 하고 있고, 엄청난 음악을 하고 있다고 부풀려지며 말한게 언니네 이발관의 결성 계기가 되었다는 여담은 유명하죠. 이 둘의 결성 계기를 보게 되면 PC통신 하이텔 메탈동 내의 하위메뉴인 ‘모던록 게시판’의 영향력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델리스파이스의 베이시스트, 윤준호는 모던록 게시판의 첫 정모를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습니다.
1994년 초, 일요일 오후 홍대 앞 어느 카페, ‘모던록 소모임(이후 모소모)’의 오프라인 창단식이 있었다. 발기인은 열 명 남짓으로 PC통신 하이텔 메탈동 내의 하위메뉴인 ‘모던록 게시판’에서 활동하는 회원들이었는데, 당시 정식 밴드 활동을 하고 있던 사람은 노이즈가든의 기타리스트 윤병주가 유일했고, 나머지는 모두 순수한 음악 리스너들이었다. 이 몇 안 되는 작은 모임에서 훗날 인디 뮤지션들이 많이 배출되는데, 언니네이발관의 이석원, 유철상 (윈디시티의 김반장), 정대욱 (가을방학의 정바비), 델리스파이스의 윤준호와 이승기, 데이트리퍼의 류한길 등이 그들이다. 나중에 회원으로 가입한 멤버는 델리스파이스의 김민규와 양용준, 그리고 스웨터의 이아립 등이 있다.
모소모의 목적은 단순했다. 새로운 트렌드에 대한 정보 공유와 감상. 피지컬 앨범을 구매하지 않는 이상 음악을 들을 방법이 없던 시절, PC통신의 모던록 게시판은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았다. (중략) 모소모 회원들은 ‘차별된 어떤 것’은 무엇이듯 흡수하고 싶어 했다. 스스로 ‘해외병 환자‘라고 부르며 당시의 음악매니아 그 누구보다도 먼저 자미로콰이와 케미컬 브라더즈, 매시브 어택에 매료된 소수의 집단이었다.
출처: 1994.01. 하이텔 모던록 소모임 생성 - 언니네이발관, 델리스파이스의 시작, 아카이브 K (#)
이러한 현상은 2020년대 들어서 DC인사이드 포스트락 마이너 갤러리를 기반으로 한 ‘포스트락 붐은 온다’ 현상과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티스트 왑띠를 중심으로 K-포스트록에 대한 리바이벌이 일어났고, 파란노을과 브로큰티스 등 유수의 밴드들을 배출했으며, 기어코 6v6 Recordings라는 레이블과 자체 페스티벌을 만들기에 이릅니다.

Business Model: (라이브 클럽)공연과 앨범 판매
라이브 클럽: 새로운 20대들의 문화
라이브 클럽은 신인 밴드들의 등용문이 되기 아주 좋았습니다. 누가 공연하는지 상관 없이, ‘일단 간다’라고 할 만큼, 일종의 영국 Pub 공연 문화와 유사한 지점들이 많았죠. (영국의 UK-Indie 문화에 대해선 이전 아티클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이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합니다.

출처: 잔다리(홍대앞) 라이브클럽 지도(Ver.20110412) (#)
앨범 판매: 집계가 잘 되지 않던 그때 그시절 ㅠ
<OUR NATION 1> 앨범은 교육 교재를 녹음하는 곳에서 마스터링이 되었다고 하죠. 흔히 길보드라고 불리는 불법복제 음반이 판을 치던 시기, 아직 박스오피스도 제대로 집계되지 않을 시기, 당시의 앨범 판매량을 볼 수 있는 곳은 아쉽게도 없습니다. 다만 아래와 같은 자료들로 추측해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2세대: 산업화 단계
2세대는 인디음악이 구조화되며 산업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에서 그 의의가 있습니다. 주요 레이블과 음원유통사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락 페스티벌이 생겨났으며, 음반 판매점이 등장했습니다. 자영업과 부업의 형태에서 조금씩 하나의 산업으로써 발전하는 성장기랄까요? 물론 이 시기, 2006년 카우치 사태가 벌어지며 인디음악의 대중화에 실패했다는 평이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에 대해 동의하진 않습니다. (물론 이때 저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기에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2세대 Big Events: “인디음악 전문”
(1) 인디음악 전문 레이블과 유통사의 등장
DRUG은 공연장이자 레이블의 역할까지 겸했던 곳이었지만, 2세대가 되며 본격적으로 “인디음악 전문”을 표방하는 레이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인디 레이블의 역사에 대해선 다수의 음악평론가들이 참여한 경향 신문의 ‘한국의 인디레이블’ 기획 기사(#)를 참고하시면 좋을듯 합니다.

(2) 우리들의 잔치, 음악 프로그램과 한국대중음악상
K-POP이 일본의 음반 쪼개팔기와 음반 구매에 의한 행사 추첨권 증정을 도입하기 시작하며 음반 차트를 장악해나가기 시작했고, 스트리밍 서비스들이 음악 시상식과 연계되며 음원차트 역시 음악성만으로 수상을 부여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이에 대한 비판은 끊이지 않았고, 음악평론가들을 주축으로 2004년 한국대중음악상이 재정되기 이릅니다. 물론, 한대음은 끊임없이 스폰서들이 변화하고, 재정적 압박을 받으며 개최여부가 불투명했던 때도 있었지만… 20년 넘는 세월 동안 한국 리스너들의 큰 잔치 중에 하나였습니다.
인디음악 뿐만 아니라, 비주류 장르음악을 하는 모든 국내 뮤지션들에게 새로운 활로가 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대중적인 성과가 어땠건, 좋은 작품성과 예술성만 보이면 주목을 받을 기회가 생겼으니깐요. 또한 한대음 노미네이트는 의도치 않게 콘텐츠 큐레이팅의 역할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 EBS 공감과 EBS 헬로루키, MBC 난장과 같은 비주류 음악 전문, 음악 프로그램이 신설되기도 했습니다.
2세대 Business Model: 여전히 공연과 앨범, 하지만 더 크게, 더 작게
(1) 더 크게, 더 많이: 우리들의 축제! 페스티벌의 시작

사실, 국내 락페스티벌의 시초는 이미 1999년의 쌈지 페스티벌과 트라이포트 락페스티벌이 있습니다만, 제대로 정착된 시기를 2세대로 보았습니다. 또한 폭발적으로 수가 늘어난 것도 2세대이기도 하구요. 여담이지만 1999년의 트라이포트 락페스티벌은 공연기획사의 경험 부족과 미숙한 진행, 그리고 몇 십 년만의 대폭우로 인해 최악이라고 평가 받고 있습니다. 이때 당시를 델리스파이스의 윤준호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습니다.
라인업으로 보자면 몇 달 앞선 여름에 열렸으나 불발로 그친 트라이포트 페스티벌이 훨씬 화려했다. 딥 퍼플부터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드림 씨어터, 프로디지 등 해외 출연진을 필두로 이름 좀 날린다는 국내밴드도 총출동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때 트라이포트를 기다리며 품었던 한국 락음악 팬들의 기대감은 실로 대단했고 나를 포함한 주변의 동료밴드들 역시 저런 무대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우드스탁의 드넓은 야외무대를 달리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기대감은 인천 송도의 어느 진흙 바닥에 패대기쳐지고 말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공연기획사의 경험 부족과 미숙한 진행, 그리고 날씨... 몇 십 년만의 대폭우가 하필이면 그때 내렸다. 끝없이 쏟아지는 장대비에 텐트촌은 흙탕물에 잠기고 우천을 전혀 대비하지 않은 무대는 물바다로 변했다. 결국 딥 퍼플과 드림 시어터 등 몇 팀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연을 취소했다. 출연진들 중 ‘누구는 인천까지 갔다가 그대로 돌아왔네’, ‘누구는 경인고속도로 중간에 연락받고 차를 돌렸네’, 등등 소식이 들려왔다. 델리스파이스 역시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출발하자마자 이 비보를 듣고 씁쓸하게 돌아와야 했다. 그때의 실망감이란! “하늘도 저주한 한국의 락음악”이라는 표현이 생긴 게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적자만 13억 원에 달할 정도로 쓰리고 아픈 경험이었지만 트라이포트의 실패는 후일 2006년에 시작된 인천 펜타포트록페스티벌의 밑거름이 되었다. “제대로 된 규모와 라인업을 갖춘 한국 락페스티벌의 출발”이라는 의미를 일구어 낸 펜타포트는 성공적으로 여름 시장에 안착하였고, 이어지는 지산 락페스티벌 등 한국 여름 록페스티벌의 전성기를 이끈 주인공이 된다.
무튼 이러한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 국내에도 락페스티벌들이 점차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페스티벌은 낙수효과를 노리기 아주 좋은 무대입니다. 헤드라이너로 관객을 모객하고, 아티스트들은 자신의 무대를 통해 팬덤을 흡수하고 성장할 수 있죠. 그리고 그 특유의 평화롭고 아름다운 분위기와, 슬램과 떼창 등 페스티벌에서만 맛볼 수 있는 분위기는 사람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2) 더 저렴하게, 더 적게: 홈레코딩의 시작, 가내수공업의 시작
집집마다 가정용 컴퓨터(PC)가 어느정도 보급이 완료가 되고, PC방은 스타크래프트 열풍으로 온국민들이 열광할 시절, 한 켠에서는 음악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현재도 대부분 사용되는 로직, 에이블톤 라이브, 큐베이스와 같은 DAW(Digital Audio Workstation)들은 훨씬 이전에 개발되었고, PC 보급이 완료되며 널리 사용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 누구나 음악을 만들 수 있는, 바야흐로 ‘홈레코딩’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죠.
2002년 이후 인디신에 정착한 ‘홈레코딩’ 기반의 음반제작 환경은 뮤지션들에게 운신의 폭을 넓혀줘서 최소한 자본이 없어서 음반을 제작하지 못하는 시대를 종식시켰기 때문이다. 나아가 홈레코딩 관련 기술의 발전으로 뮤지션이 능력만 있다면 일반 스튜디오 작업에 부럽지 않게 녹음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 많은 인디 뮤지션들은 스스로 자신의 음반사를 만들어서 앨범 제작을 하고 있고, 이는 90년대를 능가하는 결과물들이 나올 수 있는 바탕이 되고 있다.
세 번째 단계는 2003년쯤부터인데, 홈레코딩 기술과 PC의 발전으로 일부 장르에서는 홈레코딩 방식으로 음반을 제작하는 것이 일반 스튜디오에서 음반을 만드는 것과 음질 면에서 큰 차이가 없어지면서부터 나타난 현상이다. 뮤지션들의 자가 레이블 활성화와 함께 홈레코딩 방식의 활성화로 인디신에서는 출시 음반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 퀄리티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
일례로 2003년 이후로는 매년 인디신에서 출시되는 음반의 수가 200장을 넘어섰고, 2003년만 보더라도 한국 대중음악신을 통털어서 수작으로 얘기되는 코코어(Cocore) Super Stars, 푸른새벽(Bluedawn) Bluedawn, 참피온스(Champions) Tournament - EP와 같은 앨범들은 홈레코딩 작품들이었다. 이제 이들의 앨범이 단지 홈레코딩이란 이유로 퀄리티 문제를 따지던 시대는 지나갔다.
‘자가 레이블·홈 레코딩 넘어 ‘전문성’ 볼륨 업’ 경향신문, 2008년

1만명 이상의 대중을 타겟으로 하거나, 악기 20대씩 써야 하는 오케스트라인 경우라면 좋은 스튜디오에서, 좋은 퀄리티로 녹음을 받아야 하겠지만, 기타 하나와 목소리만 필요한 인디뮤지션들에겐 전문 레코딩 스튜디오가 필요 없었습니다. 붕가붕가레코드의 고건혁 대표님(a.k.a. 곰사장님)은 장기화와 얼굴들의 싱글 1집, <싸구려 커피> 발매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사실 문제는 돈이죠. 인디음악을 하면서 돈을 벌기란 쉬운 일이 아니에요. 하지만 돈이 없다면 뭐든 하기 쉽지는 않겠죠. 그렇다면 돈을 벌지 못한다면 돈을 적게 쓰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돈이 없는 상황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게 처음 시작할 때 생각이었구요. 그래서 자본없이 지속가능한 음악 생산 방식이 어떤게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수석 프로듀서라고 일컬어지는 친구의 자취방에서 모든 음악을 녹음을 하고 그 친구의 침대에 앉아가지고 아티스트는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고, 만약 소리 나가는게 두렵다면 그 친구의 담요를 벽에 걸어두는 형태로, 있는 자원 내에서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식들을 계속 고민을 했습니다. 계속 음반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렇게 누구의 힘에 기대게 되면 거기에 돈이 들어가게 되잖아요. 그래서 저희가 직접 모든 것을 해나갑니다. 음악을 만드는 것은 기본이고, 음반을 만드는 것, 심지어는 파는 것, 홍보하는 것까지도 저희 스스로 다 해결을 하는거죠. 사실 아티스트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티스트 역시 음반을 만드는 과정에 동참을 해야 하고요. 저희는 CD도 직접 저희가 굽습니다. 이렇게 한 장씩 CD를 구우면 시간이 되게 오래걸려요. 하지만 예전의 불법복제 시절에 그 용신이 남긴 유물, 일곱 장의 CD를 한꺼번에 굽는 기계의 도움으로, 저희는 그 역경을 테크놀로지를 이용해서 극복해나가고 있습니다.
근데 이런 방식의 가장 큰 장점은 사실 공장에서 음반을 만들면 최소 1,000장을 만들어야 해요. 근데 평균 인디음반이 팔리는 장수가 200장 ~ 300장입니다. 1,000장을 미리 만들어 버리면 손익분기를 넘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인데, 직접 손으로 만들어서 음반을 팔기 시작하면 10장 팔리면 또 10장 만들고, 또 50장 팔리면 50장 만들고. 그런식으로 재고를 남기지 않고 저희가 생산량을 조절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손익분기를 넘긴다는 얘기죠.
3세대: 나만 아는 밴드에서, 모두가 아는 밴드

출처 : MBC 무한도전
(1) 홍대병의 시작: 드디어! 지상파 방송!
1998년생, 한국나이 28살인 저는 3세대부터 K-Indie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작은 ‘윤하의 별이 빛나는 밤에’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밴드 전기뱀장어와 오지은 선생님을 접하게 된 것이었죠.
그러던 와중 혁오의 무한도전 출연은 여러 방면에서 충격이었습니다. 이따금씩 인디 뮤지션이 ‘유희열의 스케치북’ 같은 지상파의 음악 프로에는 출연한 적이 있었지만, 데뷔한지 1여년 밖에 안된 신인 밴드가 전국민적으로 사랑받는 예능 방송 프로그램, 그것도 무한도전(!)에 출연했으니 말이죠. 특히 오혁의 숫기 없는 캐릭터는 방송적으로도 많은 웃음을 주었지만, 그들의 스타일링과 라이프스타일은 꽤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개인적으론 이후 정규 1집 [23]에도 수록된 Die alone을 작업하는 모습이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합니다. (#) 혁오는 무한도전을 통해 크게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아이유와도 연을 맺게 되며 지금까지도 팬층을 확대해나갈 수 있었죠. 혁오가 스타트를 끊은 공중파 예능 출연은, 이후의 아티스트들에게도 큰 버팀목이 되어주었습니다. 나혼자 산다를 통해 잔나비가, 놀면 뭐하니를 통해 새소년과 박문치 등이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때부터 “홍대병”이라는 키워드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2세대까지 가장 유명한 K-Indie 뮤지션이라고 해도 제 친구들은 아무도 몰랐었거든요. 하지만 지상파 방송의 출연의 힘은 대단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고등학교 교실에는 혁오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처음엔 일종의 조롱이었지만, 점차 자조적인 Meme으로 발전했고, 이제는 힙스터, Chill 등 다양한 베리에이션이 나오고 있습니다.

출처: tvN 콩트앤더시티 (2015) (#)
(2) 유튜브의 대중화 → 찍덕의 등장

출처: 170507 대포카메라 든 아이유 직캠 IU fancam @ 영등포 팬사인회 by Spinel (#) // 얼굴이 정말 작으시네요…
좋아하는 뮤지션을 크게 보기 위해, K-POP에선 이런 대포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찍덕, 홈마가 등장했습니다. 뭐, 사실 인디 공연장은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기에 이정도로 큰 카메라를 필요로 하진 않습니다만, 인디씬에도 찍덕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홍대앞에 가야지만 무대를 볼 수 있었던 이전과 달리, 이제 지방러들에게도 인디씬의 소식을 접하고, 무대를 간접적으로 나마 즐길 수 있는 창구가 생겼습니다.
3세대 Business Model: Nothing Happens
하지만 비즈니스 모델 측면에서 보면 정말로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던 3세대입니다. 돌이켜보면 그렇습니다. K-POP은 싸이의 강남스타일 이후 엑소, 블랙핑크, BTS 등을 연달아 대 히트를 치며 글로벌 스타로 발돋움을 하고 있었고, 모든 방송사들은 K-POP에 집중되었습니다. 하지만 20년이 흘러서일까요? 인디음악을 보존해야 하고, 지켜야한다는 목소리가 조금씩 힘을 얻고 있었습니다.
고마웠어! NAVER ONSTAGE
이러한 차원에서 네이버 문화재단에선 온스테이지가 등장했습니다. 온스테이지의 성공 비결은 꾸준함에 있었습니다. 네이버 문화재단의 온스테이지는 ‘숨은 음악, 세상과 만나다’라는 모토로 2010년부터 약 13년간, 매주 새로운 아티스트로 우리를 놀래켜 주곤 했습니다. 저 역시 매주 온스테이지를 챙겨보며 수많은 아티스트들을 접할 수 있었는데, 비단 저 뿐만 그런 것은 아니더군요. 이는 ‘온스테이지 키드’라고 부를 수 있는 세대가 탄생함을 의미 했습니다.
수많은 뮤지션들의 발돋움, CJ문화재단 튠업
CJ 문화재단은 Tune Up이라는 지원사업을 지난 2010년부터 시작하며 총 210명의 뮤지션, 76개 앨범 제작을 지원했습니다. 다섯, 김뜻돌, 터치드, 한로로, 최유리, 윤지영, 지소쿠리클럽, 민수 등 훌륭한 뮤지션들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게 도움을 주었죠. 이외에도 KT&G 상상마당의 밴드 디스커버리, 한국 콘텐츠 진흥원의 뮤즈온과 K-ROOKIES 등 다양한 지원사업을 통해 뮤지션들은 음악 활동을 지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4세대: 팬덤 비즈니스로의 성장
코로나는 많은 것을 변화시켰습니다. 주 수입원이던 오프라인 공연을 진행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다른 대안들을 찾아나서야 했습니다. 온라인 공연의 시도는 처참히 실패했습니다. 오프라인 공연장 대부분이 홍대에 몰려있는 K-Indie 특성상, 전국-전세계로 동시송출할 수 있는 온라인 공연의 기획의도는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K-POP에서도 난관을 겪고 있는 온라인 공연이 팬덤의 규모와 파워가 작은 인디씬에서 제대로 이루어질리는 만무했죠. 역사 속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코로나가 종식되고서 NFT와 메타버스는 모두가 예상하였듯 빠르게 침체기를 겪기 시작했고,
하지만 전세계적으로 스타트업 붐이 일어나며 각종 서비스와 플랫폼이 등장했고, 알고리즘과 AI는 빠르게 고도화되었습니다. 인스타그램 광고, 릴스, 쇼츠 등 타겟을 넓힐 수 있는 수단이 늘어나면서 아티스트들은 더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해야 하는 과제를 떠앉게 되었습니다. 알고리즘과 큐레이션으로 무장한 스포티파이와 애플뮤직이 국내 상륙을 마치면서, 스포티파이 피칭 등 플랫폼에 연계된 마케팅 수단도 필수적이 되었죠. 이러한 변화들 중에서 제일 괄목할만한 것은 바로 놀랍게도 비즈니스 모델의 변화입니다.
4세대 Business Model: K-POP 모델의 수용?
결론부터 말하면, K-POP의 모델을 조금씩 수용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4세대 K-Indie입니다. 앞서도 언급하였듯, K-POP은 전 세계적으로 주목하고 있는 콘텐츠/IP 비즈니스 모델인 것도 있지만, 아티스트와 팬덤, 그리고 이젠 레이블의 직원들까지 K-POP을 적극적으로 좋아했던 MZ세대인 것이 한 몫했던 것으로 유추됩니다. 모두가 학창시절, 마음속에 좋아하던 아이돌 하나는 있는 사람들이죠.
(1) ‘우리도 팬덤 이름 붙여주세요!’ K-Indie 팬덤명 등장
해리포터 팬덤을 포터헤드라고 부르듯, 해외에선 이미 이전부터 스토리 콘텐츠, 스포츠 등 팬덤에 이름을 붙이는 문화가 널리 퍼져있습니다. K-POP에선 1세대부터 발빠르게 Club H.O.T.(H.O.T. 팬클럽)와 YELLOWKIES(젝스키스 팬클럽)을 창설시켰고, 공식 색상, 응원봉 디자인 등, 팬덤의 아이덴티티를 강하게 형성하도록 노력했습니다.
K-Indie도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점차 팬덤명을 부여해주기 시작했습니다. 아티스트의 이름을 딴 것에서부터, 라이브 방송을 통해서 공모된 것들, 다양한 방식으로 이름을 붙였죠.

(2) ‘우리도 굿즈 내주세요!’ 고마워요 마플샵!

출처: 뉴스토마토, 초점)역대 최다 기록 쓴 펜타포트, 한국 대중음악 축제의 '첨병' (#), 2023.08
대학교를 다닐 당시, 밴드 동아리 운영진을 하며 두 번 정도 단체복을 주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로고랑 시안만 대충 만들어서 전달해드렸는데, 그렇게 비싸지도 않고, 빠르게 배송이 와서 매우 놀랬었죠. 그러다 마플샵이 등장했습니다. 깔끔한 UI와 UX, 그리고 누구나 소형 제작 비용으로 다양한 굿즈를 만들 수 있는 서비스는 빠르게 성장세를 이어갔습니다.
인디밴드 MD 제작의 첫 물꼬를 터준 것은 혁오의 DADA이고, 뮤지션이 패션에 깊게 연관되어 큰 반응을 이끌어 냈던 것은 빈지노와 IAB Studio일 것입니다. 사실 국내 말고 해외에서도 AC/DC 티셔츠, 메탈리카 티셔츠, 오아시스 스티커 등, 아티스트 로고를 활용한 굿즈 제작은 익숙한 일입니다. 해외 밴드 티셔츠가 패션으로 자리 잡힌 것과, K-POP에서의 MD 문화, 그리고 마플샵 등 소형 굿즈 제작 플랫폼 서비스의 성장 등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해석됩니다.

출처 : DADA _ 한때 이 모자 쓰 고 다니면 멋 좀 아는 놈이라고 들었던 시절도 있었죠.
출처: IAB Studio

출처 : 마플샵
(3) ‘돈은 우리가 낼게!!’ 고마워요 텀블벅!
그 보다 더 앞선 시점에선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을 통한 앨범 제작이 한 때 융성했었고, 지금도 많은 뮤지션들이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앨범을 제작하고 있죠. 크라우드 펀딩의 가장 큰 장점은 손익분기의 Risk를 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피지컬 앨범, 굿즈의 경우 최소 주문수량 (MOQ)와 함께, 개당 제작 비용이 들어가기 마련이죠. 아티스트는 스스로 손익분기 관리와, 판매와, 재고 관리를 담당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크라우드 펀딩은 선주문 후제작 방식으로, 이러한 리스크를 지지 않아도 된다는 큰 장점이 있습니다. 펀딩이 100% 되지 않는다면, 제작이 들어가지 않으니 위험부담을 질 필요도 없게 되죠.

출처: 파이낸셜뉴스, '창작자들의 놀이터' 백패커·와디즈 "마켓 플랫폼 집중 투자" [혁신의 숲에서 찾은 스타트업] (2023.05) (#)

출처: 텀블벅
(4) 수직적 통합화: Vertical Intergration
‘제작 - 유통 - 스트리밍/앨범/굿즈’로 매우매우 간략화할 수 있는 콘텐츠 산업은, 각 단계별 전문 회사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영화의 경우에도 영화 제작사, 영화 유통(배급)사, 영화극장 운영사 등 자리를 잡고 있죠. 하지만 K-POP의 경우 매우 특이하게 IP를 제작하는 레이블이 유통과 플랫폼, 앨범/굿즈까지 모두 자회사를 통해 운영을 하며 중간 수수료를 절감하고 기업의 규모를 키우는 Vertical Intergration이 일어나고 있는데요. 대표적으로 레이블, 유통, 공연 기획, 그리고 플랫폼까지 사업을 확장한 HYBE가 있습니다.

출처: HYBE 유튜브 채널, HYBE: NEW BRAND PRESENTATION (2021.03.) (#)
이에 질세라 K-Indie도 인디음악 내의 Value Chain(가치사슬)을 담당하는 자회사를 만들면서 기업 규모를 키우고 있습니다. 사실 유니버설 뮤직, 소니뮤직, 워너브라더스 뮤직 등 해외 대형 레이블 같은 경우엔 하나의 영역에서 장르적 확장을 가져가는 수평적 통합(Horizontal Intergration)을 가져가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일단 장르 안에서의 Value Chain을 최대한 가져가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힙합을 좋아해서 힙합 회사에 일하시는 분들이 갑자기 포크 뮤지션을 담당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겠죠.

이러한 현상에 대해 두루두루AMC 강명진 대표님은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Q. 좋아해서 시작한 일이지만 기업을 운영하면서 꼭 해야 하는 일들도 분명 있었을 것 같아요.
A. 코로나를 겪으면서 그리고 회사의 규모가 커지면서 아티스트들의 니즈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함께하는 동료인 둘둘이(두루두루AMC 직원 별명)들이 생기면서 그리고 코로나를 겪으면서 우리가 정말 좋아하는 것, 아티스트가 정말 좋아하는 것, 우리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너무나도 필요한게 돈이라는걸 깨닫게 되었어요. 그리고 코로나는 사실 공연 업계나 저희 쪽 업계에서는 굉장히 위기의 경험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만약에 이윤을 계속 만들어내지 못해서 회사에 돈이 없고, 함께 일해주시는 분들이 없게 되면 아티스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지금처럼 원활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거죠.
말씀하신 것처럼 저희 아티스트들의 경우에는 돈을 벌기 위해서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아니거든요. 본인들이 하고 싶은 걸 했는데 정말 너무나도 감사하게 돈을 벌 수 있게 된 거지. 그러면 지금까지의 관계를 해치지 않으면서 회사는 회사대로 계속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까를 처음 고민하게 되면서 비로소 두루두루가 기업이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그 과정에 여러가지 시도들을 하고 있는 상황이죠.
아티스트를 100% 구동하지 않더라도 돈을 벌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겠다. 그래서 새롭게 시작하게된 분야들이 있죠. 두루두루 안에 형제 회사처럼 모레코즈 유통회사를 만든 것도 그 이유고, 기존에 나왔던 저희 음반들을 계속 사람들한테 들려질려면 유통 구조가 필요하고. 기존에는 외부에 맡겼었는데, 저희 회사에 타이틀들이 많이 생기고 하다보니까 유통을 하게 되면서 반드시 두루두루 아티스트가 아니라 저희와 결이 맞는 좋은 음악들을 저희 회사에서 유통을 하게 되면서 그게 또 하나의 수익구조가 되었고, 두루두루 팩토리라고 아티스트의 굿즈를 만드는 회사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아티스트의 이미지라던지 기존의 IP를 가지고 저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제조업 관련된 쪽으로 확장을 한 것도 사실은 그런 아티스트가 본인이 하고 싶은 활동을 전념할 수 있도록 다른 수익 구조를 만드는 과정에서 새롭게 시작하게 된 일인 거죠.
물론 초기엔 이러한 K-POP 모델 수용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들도 상당수 나왔던 것 같습니다. K-POP 모델의 수용은 ‘기존 팬덤의 구매력 강화’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팬덤의 정체성을 강하게 형성하고(=팬덤명 부여), 팬 계정이 생겨나며 무료로 홍보가 되고, 공식 굿즈를 제작하여 BM을 확대합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세속적이다’, ‘별 걸 다한다’, ‘팬 장사질이다’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여전히 조금은 남아있기도 한 것 같습니다.
저희 Lab CHASM(랩 캐즘)은 자생가능한 음악 생태계를 비전으로, 20여명의 대학생들과 사회 초년생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지속가능한 음악 생태계’를 설정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옳으냐?”를 기준으로, 더 건강한 생태계는 “자생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러기 위해선 ‘외부의 지원이 필요 없이도, 산업 내에서의 수요와 구매력만으로 건강히 성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돈이 안되는 인디음악이 돈이 되게끔”할 수 있는 어떤 노력도 다 해보려고 합니다.
RE:CAP | 중요한 건 과거보다 현재, 현재보단 미래!
이전까지 K-Indie 세대에 대한 논의가 없었던 터라, 연도 및 아티스트의 구분에 대해선 논쟁이 다분할 것 같습니다. 랩캐즘 내부에서도 그랬구요. 또한 저희가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1세대와 2세대에 대해선 정보가 잘못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지만 첫 물꼬를 텄다는 것에서 자체적으로 의의를 가져보려고 합니다. 다양한 의견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렇듯, K-POP과 K-인디는 동일한 세대분석 방법론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슬픈점이 있다면, K-POP은 빠르게 수익구조를 다변화하고, 위버스와 같은 자체 서비스를 고도화시키며 글로벌로 성장했던 반면, 30년이 지나도 인디음악의 구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렇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잘 보아야 합니다. 흔히 음악 업계에서 하는 말이 **‘음악을 신발이나 사과 등 일반 재화로 취급해야 한다’**라고 하죠. Product의 특수성을 배제시켜야 한다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Lab CHASM은 이를 받아들여 아예 핵심 가치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외식업계로 비유를 들어볼까요. K-POP은 대형 프렌차이즈고, K-인디는 자영업 카페입니다. 이미 소상공인들은 어떻게 하면 인스타그램 광고를 효과적으로 할 것인지, 재방문율을 높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다양한 방법과 강연들이 있습니다. 뮤지션들은 이제 1인 자영업 기업으로써, 이러한 방법론들을 습득해야 할 것입니다.
데뷔 7여년만에 드디어 붐을 이끈 실리카겔, 입소문으로 빠르게 강력한 팬덤을 구축한 한로로, 끊임없는 장르적 변환에도 탁월한 작품을 내놓고 있는 김뜻돌 등, 인디씬은 전례 없는 성장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락 붐은 온다’가 실현되는 것일까요? 랩캐즘은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만, 해결해야 할 과제도 산더미입니다.
새로운 BM(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1세대 인디씬때 부터 이야기가 나왔지만 정확히 안착되진 않았습니다. 점차 인디 뮤지션들의 매니지먼트와 마케팅은 K-POP과 닮아갑니다. 즉, 점차 음악 비즈니스에서 콘텐츠/IP 비즈니스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독립영화에 대한 정의가 끝나 법적으로 관리를 받고 있는 한국 독립영화계와는 달리, 인디음악은 30년 동안 정의조차 합의되지 않아 제도적 안전장치를 만들기 어렵습니다.
참고: 영화관 티켓 가격에서 일정 %를 독립영화 등에 투자할 수 있도록하는 영화발전기금 관련 법안은 지난 2024년 폐지되었으나, 현재 다시 되살리자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출처: 사단법인 한국음악레이블산업협회 (2021)
그리고 여전히 서울, 그 중에서도 홍대를 거점으로 대부분의 뮤지션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최근 부산씬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으나, 여전히 서울에 비하면 인프라 측면에서나, 수요 측면에서나 매우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는 아티스트의 성장에 커다란 한계점을 제시합니다. 중소형 공연장이 거의 전무한 지방의 인프라이기에 전국투어를 돌며 팬덤의 성장과 수익적인 측면을 거두기 매우 어렵습니다.‘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출처: 한국음악레이블산업협회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영국의 역사가, E.H. 카가 자신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 쓴 문구입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결국 현재 자신의 상황과 특성을 도출해내려는 욕구에서 기인할 것입니다. 한국 인디씬은 4세대의 특징에 대해서 더 연구해야 하며, 다가올 5세대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다면, 꿈꾸던 인디붐이 우리의 의도에 의해 실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